좋은 성직자와 사이비와 구별하는 방법은 인간의 순수한 의도를 그들이 어떻게 보는가에 있다. 사이비는 순수한 의도를 어떻게든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한 바를 이루려고 하고, 성직자는 그 순수한 의도를 그 스스로가 좋은 방향으로 가도록 돕는 일을 하는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자유로울 때만이 이런 상황이 분별이 된다. 죽음이라는 관념의 단어를 가지고 인간을 착취하는 모든 종교는 사라져야 마땅하다. 종교는 신념이 아니며 어느 때고 버릴 수 있어야 하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버릴 수 없는 종교는 문제가 있다.
민본에 기반을 둔 질서(법) 위에 어떠한 것도 옹립(擁立)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세계는 사례인 것 모두이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세계는 사실들에 의해, 그리고 그것들이 모든 사실임에 의해 결정된다. 대상들은 이름 될 수 있을 뿐이다. 기호들이 그것들을 대표한다. 나는 대상들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을 뿐, 대상들을 언표(言表)할 수는 없다. 명제는 사물이 어떠한가만을 말할 수 있을 뿐, 그것이 무언인가는 말할 수 없다.(논리철학논고 서문)
정신적 탐구에는 통틀어 두 가지 길만이 열려 있으니, 곧 미학 그리고 정치경제학이다(말라르메).
모든 연역은 선천적으로 행하여진다. 한 요소명제로부터는 다른 어떤 요소명제도 연역될(유추될) 수 없다. 어떤 한 상황의 존립으로부터 그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한 상황의 존립을 추론하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도 불가능하다. 그러한 추론을 정당화해 주는 인과적(因果的) 연결(連結)은 없다. 우리는 미래의 사건들을 현재의 사건들로부터 추론할 수 없다. 인과적 연결에 대한 믿음이 미신(迷信)이다. 의지의 자유는 미래의 행위들이 지금 알려질 수 없다는 데서 성립한다. 인과성(因果性)이 논리적 추론처럼 하나의 내적(內的) 필연성(必然性)일 때에만, 우리는 미래의 행위들을 알 수 있다-앎과 알려지는 것의 연관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연관이다.
실로 언표(言表)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 자신을 보여준다: 그것은 신비적인 것이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克服)해야 한다; 그때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보게 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沈默)해야 한다(비트겐슈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