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단순한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여 삶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 불교는 불필요한 의미를 제거하여 진실에 접근해간다. 과도한 의미 부여는 문학이다.
불교는 부처가 없어도 존립이 가능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시작부터 불가능 하다.
경제학에는 정치, 도덕적 판단에서 자유로운 객관적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학은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개념’일 뿐이다. 여기서 사실이라 함은 “역사적 실체”를 이름이며, 개념이라 함은 “후대에 조작된 픽션”을 이름이다. 역사적 실체는 그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개별적 사상을 규합할 수 있는 사회적 제관계를 포섭하는 개념으로서 존재론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우리가 보통 이러한 역사적 현상을 “운동” (movement) 이라고 부르며, 또 그러한 운동을 표방하는 사람들의 집합체를 역사적 실체로서의 “학파” (school) 라고 부른다. 과연 이러한 의미맥락에서 조선조의 실학은 “실학운동”이며 “실학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일까? - (김용옥, 독기학설).
공부한다는 것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모르는 것은 알면 해결되나 습관화 된 것은 정진(精進)하지 않으면 고칠 수 없다.
인생에서 본인이 내려야 할 결정의 어떤 부분을 남에게 맡긴다면 그 부분은 남의 인생이 된다. 자신의 인생을 남의 판단과 기준에 맡기는 인간,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는 인간, 나는 그런 인간이 세상을 망친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만큼은 스스로의 기준대로 사는 사람들은 범인(凡人)이 아니다. - (김창규, 범인(凡人)은 이 안에 없다, 생각비행, 2016).
행복은 개인의 몫이지만 불행은 공공이 해결해야 하는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