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사례인 것 모두이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세계는 사실들에 의해, 그리고 그것들이 모든 사실임에 의해 결정된다. 대상들은 이름 될 수 있을 뿐이다. 기호들이 그것들을 대표한다. 나는 대상들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을 뿐, 대상들을 언표(言表)할 수는 없다. 명제는 사물이 어떠한가만을 말할 수 있을 뿐, 그것이 무언인가는 말할 수 없다.(논리철학논고 서문)
정신적 탐구에는 통틀어 두 가지 길만이 열려 있으니, 곧 미학 그리고 정치경제학이다(말라르메).
모든 연역은 선천적으로 행하여진다. 한 요소명제로부터는 다른 어떤 요소명제도 연역될(유추될) 수 없다. 어떤 한 상황의 존립으로부터 그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한 상황의 존립을 추론하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도 불가능하다. 그러한 추론을 정당화해 주는 인과적(因果的) 연결(連結)은 없다. 우리는 미래의 사건들을 현재의 사건들로부터 추론할 수 없다. 인과적 연결에 대한 믿음이 미신(迷信)이다. 의지의 자유는 미래의 행위들이 지금 알려질 수 없다는 데서 성립한다. 인과성(因果性)이 논리적 추론처럼 하나의 내적(內的) 필연성(必然性)일 때에만, 우리는 미래의 행위들을 알 수 있다-앎과 알려지는 것의 연관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연관이다.
실로 언표(言表)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 자신을 보여준다: 그것은 신비적인 것이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克服)해야 한다; 그때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보게 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沈默)해야 한다(비트겐슈타인).
기독교는 단순한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여 삶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 불교는 불필요한 의미를 제거하여 진실에 접근해간다. 과도한 의미 부여는 문학이다.
불교는 부처가 없어도 존립이 가능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시작부터 불가능 하다.
경제학에는 정치, 도덕적 판단에서 자유로운 객관적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